글쓰기 외주화, 효율과 본질 사이의 타협 지점 찾기

난이도는 낮추되, 나만의 목소리는 유지할 수 있도록.

하미연5분 읽기


개인 블로그를 시도했던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블로그, 일기, 운동처럼 꾸준히 해야 의미가 생기는 일들은 보통 꾸준히 하기 어렵기 마련이죠. 작년 5월쯤 쓴 글이 이 블로그에도 올라와 있는데, 글자 하나까지 모두 제가 직접 쓴 글입니다. 글의 내용 자체는 AI를 쓴 개인적인 경험이었지만, 그 경험을 묘사하는 수단은 오롯이 제 머리와 키보드를 치는 손이었습니다. 당시 기억으로는 글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얼추 5-6시간 정도가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쓴 글은 분명 뿌듯했는데, 정작 그 방식을 지속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반나절이 녹아 버리는 글쓰기 시간

글을 쓸 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머릿속에 늘 들어있습니다. 앉자마자 바로 쓰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원래 글을 빠르게 완성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분량이 길기도 하고, 한 번 쭉 완성한 후에 퇴고하는 게 아니라 한 문단 쓰고 퇴고하고 두 문단 쓰고 다시 처음부터 퇴고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그때 자주 가던 건대입구역 근처 카페에서 글을 쓰던 기억이 아직도 있는데요. 주말에 1시쯤 도착해서 카페 문 닫는 시간이 다 되어서야 나왔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면 당연히 뿌듯하고 글을 쓰는 6시간을 온전히 제 뇌에 흡수할 수 있습니다. 특히 머릿속에 두루뭉술하게 담아둔 생각을 하나의 글로 정리하면서 구조화하고 연결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글 하나에 6시간을 쓰면서 꾸준히 글을 쓴다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사무직 직장인에게 소중하디 소중한 주말의 대충 1/4이 날아가는데, 직업적으로 글 쓰는 사람도 아니면서 이만한 시간을 투자할 정도의 애정이 있는 건 아니었거든요.

완벽주의를 내려놓고 소요 시간을 절반으로 줄이기

그러다 AI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올해 5월에 목표를 바꿨습니다. 완벽주의를 내려놓고 일단 글을 꾸준히 쓰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습니다. 요즘은 포스트 하나 완성에 약 2~3시간 정도가 걸립니다. 얼추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초안과 퇴고는 나, 그사이 재구성은 AI

포스트 작성을 글감을 모아둔 초안, 재구성과 완성, 퇴고 세 단계로 나누면 초안과 퇴고는 제가 담당하고 재구성은 AI가 담당합니다.

우선 제가 초안을 씁니다. 이때 글을 잘 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제 머릿속에 들어 있는 '하고 싶은 말'을 최대한 남김없이 꺼내놓는 데 집중합니다. 그래서 문단으로 나뉜 줄글로 쓰지 않고 개조식으로 나누어 생각나는 대로 쉼 없이 씁니다. 글의 구성상 처음 나와야 했던 이야기가 뒤늦게 생각나서 마지막에 들어가기도 하고 결론에 해당하는 문장이 처음부터 등장하기도 합니다. 원래는 이렇게 나열된 문장을 일련의 스토리로 보이도록 재구성하면서 윤문을 수없이 거칩니다.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그래서 이 파트를 AI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바로 이 포스트의 재료가 된 초안의 일부

'나답게' 쓰는 기준점이 될 tone-guide.md

다만 그냥 '블로그 포스트 작성해줘' 같은 방식을 쓰고 싶진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AI 갸륵체(어느 인스타그램 웹툰에서 본 건데 아주 정확한 단어라고 생각합니다.)를 극혐하기 때문에 '내가 쓴 것처럼' 보이길 바랐고, 이게 어렵다면 적어도 AI 티는 최대한 줄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write-blog-post skill을 만들 때 작년 5월 저 혼자 전부 작성한 포스트 3개를 제공했습니다. 글자 수로는 약 3만 자 분량입니다. 제 글에서 보이는 특징을 먼저 추출하라고 했고, 이 특징은 tone-guide.md라는 고정된 문서로 관리합니다. AI는 제가 두서없이 써둔 초안 draft.md와 tone-guide.md를 놓고 블로그 포스트를 씁니다.

tone-guide.md를 실제 제 글 기반으로 만들었어도 AI가 완성한 포스트에는 여전히 AI 갸륵함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제가 마지막 퇴고를 한 번 더 거칩니다. 여기서 제가 AI가 쓴 글을 고친 부분 또한 tone-guide의 재료가 되니, AI가 블로그 포스트를 쓸 때 일부러 파일을 2개 만들게 했습니다. 똑같은 내용으로 index.md와 index.ai-draft.md를 만듭니다. 저는 index.md에서 퇴고하고 이걸 블로그 웹페이지에 표시합니다.

블로그에 완성된 글을 배포할 때는 /publish-blog-post 스킬을 호출합니다. 이 스킬은 두 가지 일을 합니다. 하나는 github에 소스코드를 push해서 새 글을 블로그에 배포하는 것, 다른 하나는 index.md와 index.ai-draft.md를 비교 분석하는 것입니다. 글이 계속 쌓일수록 제가 AI를 고쳐준 기록도 쌓이니 조금이나마 더 '나처럼' 쓰게 된다는 게 제 가설입니다.

humanize도 쏠쏠했지만 여전히 남은 번역체 문제

요새 LinkedIn에 'AI 티를 제거해주는 윤문' skill이 많이 보이는데, 그중 humanize를 요즘 잘 쓰고 있습니다. 확실히 한 번 돌리고 나면 소소한 도움이 되었는데요. index.ai-draft.md를 만들 때 마지막 단계로 humanize를 거치도록 고정해두었는데, 적용하기 전보다는 오그라드는 느낌이 줄었습니다. 다만 그런 느낌이 든다 정도이고 엄청 뛰어난 차이를 체감하진 못했습니다.

특히 AI 글 특유의 번역체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지가 요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입니다. 주로 잘 어울리지 않는 표현을 섞어 쓰는 게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A가 B와 C를 가릅니다", "A가 B를 이깁니다" 처럼, 비유적인 표현인데 흔히 쓰이는 어휘 조합이 아니어서 어색한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서점에서 집어 든 책 [사고외주]

사고외주, 홍진기 지음, 어크로스. 이미지 출처 : 교보문고

여기까지가 제가 지금 블로그를 쓰는 방식입니다. 사실 이걸 블로그 글감으로 떠올린 계기는 오랜만에 놀러 간 서점에서 산 사고외주란 책입니다. 책 판형이 작고 얇아서 금방 읽겠다 싶은 것도 있었지만, 제목 때문에 바로 집어들고 구매했습니다. AI 많이 쓰는 사람치고 자기 머리를 AI에게 "외주 준 것 같다"는 표현 안 쓰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책의 저자는 연세대 화공생명공학과 홍진기 교수님입니다. 요즘 들어 갑자기 대학생들 보고서 퀄리티가 올라갔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문제는 이게 점진적으로 일어난 변화가 아니라는 겁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AI 덕에 학생도, 기업 직장인도 예전보다 더 나은 문서를 더 빠르게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안에서 자신의 생각을 녹여내는 시간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글의 한 대목을 왜 이렇게 생각했냐 물어보면 학생이 멈칫합니다.

쓰지 말자가 아니라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질문

그렇다고 해서 책이 AI를 쓰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그 어느 누구도 이런 주장은 할 수 없을 겁니다. 전 세계가 돌아올 수 없는 임계점을 지나버렸다고 해도 반박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합니다. 대신 책이 던지는 질문은 'AI를 어떻게 쓸 것인가'입니다. AI에게 답을 달라고 요청할 게 아니라, 왜 이 답이 나왔는지 파고들고 자신의 생각으로 소화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생각을 외주화하는 세상일수록 개인의 취향과 논리는 더 단단해져야 하고 '나 자신'이 바로 서야 합니다.

제가 외주 준 것과 아직 넘기지 않은 것

앞서 설명한 블로그 포스트 작성 방식은 '글감의 재구성'이라는 중요한 단계를 AI에게 외주 준 셈입니다. 초안에 bullet point로 나열한 문장 하나하나가 나름의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제가 카페에서 6시간 동안 달렸던 건 그 정보를 말이 되는 순서로 재구성하고 잘 흡수되는 글이 되도록 잡초를 줄이며 윤문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당시의 포스트 작성 경험과 요즘을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요즘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남에게 보일 수 있는 정도로만 후다닥 정리해서 올리는 느낌이라면, 당시에는 완연한 주장을 풍성한 근거로 두르려고 한계까지 애써본 시간이었습니다.

다만 약간 항변을 해보자면, 초안과 퇴고는 결국 제가 하고 '무엇을' 쓸지는 전적으로 저만 결정합니다. 아직 완전한 AI 외주화는 아닙니다.

저는 언제나 현실적인 접근을 좋아합니다. 루틴을 유지하려면 제 의지를 다잡을 게 아니라 주위를 그 루틴을 지킬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택배 상자가 쌓여도 안 뜯는 버릇이 있으면 커터칼을 현관문 근처에 두는 것처럼 말입니다. 글을 꾸준히 쓰는 것도 중요하다면 꾸준함에 방점을 두고 글쓰기 난이도를 다소 낮추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지 않을까요.

작년의 저는 카페 문 닫는 시간까지 앉아 있다가 글 하나를 얻었고 지금의 저는 그 절반의 시간으로 이 글을 씁니다. 이 변화가 제게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 줄 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겠습니다.